내가 태어나던 해에 어머니는 화방을 개업했다. 아그리파 석고상부터 수채화 붓 15호, 캔버스, 벼루, 이젤 같은 것들을 팔았다.
화방
화방을 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외수, 천상병 같은 예술인들과 학창 시절부터 어울려 다녔다. 예술 쪽에 훤했다. 소도시라 수요가 작았지만 제대로 된 첫 화방이라 장사가 잘 됐다.
화방이라는 특성 상 여러 학교의 미술 선생님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나는 어깨 너머로 미술의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상도 여러 번 탔다. 내 크로키와 수채화를 보고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미술을 전공할 생각이 있느냐. 너는 재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공고에 진학해서 자동차 정비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이 될지 전혀 몰랐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몇 가지 눈에 띄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걸 콕 집어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하나는 예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었다.
문학
중고등학교 때에 나는 세계명작시리즈를 대부분 읽었고, 고3 때는 이상문학상을 1회부터 다 읽었다. 영어를 잘해서 나는 영어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소설을 읽었다. 아무도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단편소설집도 무지하게 읽었다. 나는 단편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학에 가면 소설을 많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나는 세계의 예술가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사진으로 보는 미술가들의 세계는 신비 그 자체였다. 내가 사랑한 미술가는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이중섭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비싼 화집은 물론, 그를 느끼기 위해 출장 일정 중에 암스테르담까지 다녀올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가 가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파리의 사크레쾨르 골목은 유럽 출장마다 빠지지 않고 들렀다. 그가 마셨다는 싸구려 술 압생트를 마시고 취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생전에 작품 딱 한 점을 팔았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처제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밀어부쳤던 마케팅 덕이다. 고흐를 알게 해준 마케팅 스킬에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나는 마케터 출신이라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중섭
이중섭의 삶. 고흐보다 더 기구하면 기구했지 덜하지 않았다. 평생 한 여자와 두 아들을 그리워했다. 훌륭한 작품이 춘화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거기서 그림을 팔아 두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개인전은 빚만 남겼다. 정신이 쇠약해졌고 거식증을 앓았다.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는데, 사망 당시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다. 병원은 그를 ‘무연고자’로 처리했다. 도무지 연락이 닿을 사람을 찾지 못했다. 한때 이중섭은 2평짜리 방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사진만 봐도 희망과 즐거움이 느껴진다. 그런 그가 비극적인 말년을 보냈다. 행복한 모습이 상상되는 이중섭의 제주 생가터를 방문하고 가슴이 쓰라렸다.



사명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작가가 되었다.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사업을 하면 어떨까. 나는 중학교 때 사설 BBS를 운영해서 어른들과 번개를 주도했는데, 뭔가를 설계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이 꽤 재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사업의 본질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나 미술처럼 설계-창조-사업의 재능이 내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런데 내 천성의 교집합을 따라 ‘예술을 사랑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내가 사업을 하는 이유는 돈이 아니다. 나는 이 시대의 이중섭이나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사람이 방황에 질식사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펼치도록 돕고 싶다. 예술혼이 대중에게 발견되어, 그 과정에서 정당한 수익 파이프라인을 획득하길 원한다. 그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회사가 지속가능해야 한다. 사업을 더 키워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이다. 창작에 필요한 공간이나 생활비를 대주고, 그것을 어떻게 마케팅해서 상업화하는지 코칭해주는 실질적인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런 긍정의 도미노가 아주 구석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가길 원한다.
적어도 이중섭이 가족을 상봉할 수 있는 배삯과 한 달 생활비가 있었다면…
이중섭과 고흐가 못 다한 소명을 이루는, 그 날을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