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재미
“무슨 재미로 사니?”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묻는 질문이다. 회사 동료들에게도 가끔 묻는다. 할 말이 없어서 묻는 게 아니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당신이 무슨 재미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때때로 나는 내게 묻는다.
“내가 사는 낙이 뭔가, 요새.”
이 낙에 살지
삶의 의미, 자아실현, 경제적 안정 다 중요하다. 그러나 매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사는 낙이다.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서 말하는 행복의 3요건은 즐거움, 몰입 그리고 삶의 의미다.
매순간 몰입할 순 없고, 삶의 의미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피부 진피층에서처럼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 그러므로 Carpe Diem의 짜릿한 도파민을 쏴주는 건전한 즐거움이야 말로 우리가 순간을 성실하게 만드는 기쁨이다.
나는 이 낙에 살았지
짧은 내 삶을 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즐겼던 폭풍 같은 낙과 즐거움의 역사였다. 한때는 공부하는 낙도 있었다. 세계 문학 전집을 읽어나가는 즐거움, 이상문학상을 도장깨기로 돌파하던 낙도 선하다. 연극에 빠져들었고, 사람들을 알아가는 즐거움, 그들 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모두 20대의 낙이다. 아, 술…
사회인으로 ‘이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즐거움도 빠질 수 없었다. 뭔가 직장인 사이에 휩쓸려서 드라마에서 보던 아재들의 세계에 발 담근다는 희열이 있었다. 비싼 주점을 기웃거리고, 명품을 사며 뭐라도 된 것 같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덧없는 낙에도 빠져 보았다.
이런 기억들이야 말로 나중에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나만의 유산이다. 결국 그 덧없음을 딛고 지금 내가 있다.

낙이 없는 삶
시간이 지나고 나면 황홀했던 즐거움도 시시해진다. 그게 인생이다.
그중 가장 쓸쓸한 것은 낙 없는 삶이 아닐까 싶다. 이쯤되면 낙이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때로는 몰입하는 낙, 의미를 발견하는 낙이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경계 없이 섞이고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최근 3년 간, 내 낙이 뭐였냐고 물으면 의외의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맨 바닥에서 일어서는 낙. 생전 처음 사업을 성공시키는 낙.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지켜보는 낙.
특히나 0부터 시작하는 낙은 ‘미친놈’ 소리를 듣기 충분하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낙이다.
낙이 없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즐거움’이 없다는 뜻이다. 삶이 건조하다. 그러나 한번 더 물었을 때 낙이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그 어디에도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을 자백하는 셈이다. 삶의 열정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한번 더 묻고 싶다. 그래도 낙이 있지 않나. 잘 생각해 보라구.
그때 그의 대답을 꿈꾼다. “그래, 사실은 있지. 내가 이렇게 꾸역꾸역 버텨가는 것 아니겠어. 이것 자체로 내 삶의 의미가 있는 거니까.”
삶의 의미는 연역이 아니라 귀납이다. 살아온 발자취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자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것처럼 견고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삶에서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압력이 남아 있기에, 감히 그것을 ‘삶의 낙’이라 칭하고 건배를 하고 싶다.
“아하, 그 낙에 사는구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