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0에서 시작한다. 우리 모두가 잉태되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기억이 안 나나?)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슴푸레 이해하기로 우주도 그렇다. 빅뱅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작이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다. 그 시작은, 거의 0이다.
원래 시작은 0이다.
그런데도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뭔가를 미리 배우지 않으면 실전으로 들어가기를 겁낸다. 그 결과로 쓸데없는 것만 잔뜩 배우고 실전에 써먹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제대로 된 배움은 늘 실전에서 오건만… 0으로 시작하면 큰 일 나는 줄 안다. 그래서 현대인은 나약하다(고 하나보다). 나약한 현대인들은 그 반대급부로 인간의 나약함을 질타한 니체를 인용하며, 숲속으로 들어간 소로우를 동경한다.
나는 나를 미워한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나를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모르겠다. 나는 다만 내 인생을 책임감 있게 살고, 의미 있게 창조해내고 싶은 사명감이 있다. 남에게 휘둘리는 건 이제 질색이다.
그래도 가끔엔 내 인생에 대해 이런 저런 잣대로 평가를 해볼 때가 있다.
그중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일 뿌듯한 면이 있다.
내가 기꺼이 0에서 시작할 줄 안다는 것이다.
- 고등학교 때 나는 혼자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다녔다
- 대학교 등록금을 빼고 나 혼자 학비를 댔다
- 월세 자취방에 살았는데 그 비용을 혼자 벌었다
- 돈을 벌기 위해 과외를 찾고 학교 도서관을 전전했지만 단 한번도 내 자신을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종 친구들에게 삽겹살에 소주도 한 잔 샀다. 돈과 나의 거리를 두었다.
- F&B업계의 공무원이라 칭하는 회사를 퇴사했다. 10년 만에 나온 퇴사자라고 했다.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기 위해 다시 0으로 돌아갔다.
- 외국 회사의 고액연봉 임원에, 누가 봐도 과분한 복지를 버리고 또 0으로 돌아갔다.
- 백수가 되었다. 무늬만 백수가 아니라 벌이도 0, 직급도 0, 미래도 0인 찐백수가 되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가 다섯 살이었다.
- 닥치는 대로 내 길을 찾았다. 물론 0에서.
- 기업을 세웠다. 물론 0에서.
- 그렇게 0에서 시작한 기업은 아직 미약하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약 5억의 연매출, 9명의 소속 근로자, 사무실 두 켠을 가진, 명망 있는 거래처를 둔 주식회사로 성장했다. 물론 0에서.
- 그 사이 유튜브도 했다. 물론 0에서. 퇴사하면서 스스로에게 선물로 준 맥북 프로로 난생 처음 영상편집, 이미지편집, 홈페이지 제작 툴 같은 것들을 배웠다. 혼자서, 물론 0에서. 이제 유튜브 영상은 450개가 넘었고, 구독자는 갓 5,800명을 넘었다. 물론 구독자는 0에서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구독자가 5,000명이 넘었을 때 아주 우연히 누나의 지인이 내 구독자라는 이유로 내 채널을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구독자 0에서 시작했다.
- 머리를 혼자 자른다. 5년 됐다. 물론 0부터 시작했다.

미친 놈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가끔 0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기업이 내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을 때, 내 잘못이 아닌 다른 이유로 전략과 전술이 흔들릴 때,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가끔 역성장할 때, 뭐 그럴 때…
0부터 시작하는 것은 매우 귀찮고 기운 빠지는 일이다. 물론 내가 0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지금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을 찾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0부터 시작할 수 없는데, 조금 멋드러지게 표현하면 이렇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0에서 시작할 수 있다.
내 주변에 0부터 시작할 줄 아는 사람이 가득 차길 꿈꿔 본다. 나 역시 안주하지 않길 바란다.
20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