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일 오후, 나는 아무 준비 없이 강원도 숲속으로 차를 운전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축구장 다섯 개 정도의 숲속이 오롯이 내 아지트가 되었다.
숲속에 나 홀로라니.
늘 꿈꿔 왔으며, 경험으로 증명한, 가장 나를 살아있게 하는 순간이다.
숲속에 홀로 있으면 나는 산책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인 것처럼, 여기저기를 산책한다. 길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을 탐험하듯이, 산책 나온 개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자유를 만끽하듯이 말이다.
그러다 보면 의외의 깨달음과 기쁨을 맞이한다. 때로는 마음이 먹먹해지는 일을 겪기도 한다. 이번 방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아지트를 발견했다. 젊고 기운 넘치는 고양이가 기둥과 텐트 사이를 바쁘게 누비고 다닌다. 여기가 이곳 고양이들의 핫한 플레이스라도 되나.
그러다가 누군가 무심코 펴 놓은 캠핑 의자 위에서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깜짝 놀란 것을 놀려주려고 녀석을 깜짝 놀라켰다. 그런데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가까이 가본다. 녀석은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녀석을 장사지내 주었다. 새끼 고양이가 죽어 있는데도 그 주변에서 자기들끼리 물고 구르며 놀고 있는 고양이들이 야속했다.
숲에서 나는 짐승들의 장사를 몇 번 지내준 적이 있다.
죽어가는 오소리가 숨을 쎅쎅 내뱉고 있을 때에, 그의 곁에서 기도를 해주었다. 죽음의 순간에 적어도 누군가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라고 말했다. 그리고 혹시나 나중에 내 죽음의 순간에도 네가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했다.
팔뚝 만한 박새를 땅에 뭍어준 적도 있다. 작은 참새의 장사도 지내주었다.
한 번은 청설모가 나무에서 떨어졌는지 죽어 있어, 곱게 땅을 파고 기도를 하고 장사를 지내주었다.
이번에는 새끼 고양이다.
나는 이런 죽음의 현장에서 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고, 내 삶 역시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 그게 뭔 말이냐면 내 죽음도 이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채로 올 거라는 말이다.
이 동네에는 덩치가 큰 암컷 고양이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미야다.
한 때 나는 그를 싫어했다. 여기저기 오줌을 갈기고 다느는 데다가, 사람을 봐도 마치 자신이 위인 것처럼 오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 구운 새우를 주며 우리는 서로를 믿게 되었고, 이제는 그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늘 그의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을 보았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나무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한다.
나는 알고 있다. 다음은 그의 차례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내게 들킨다면 그를 위해 진심을 다해 장사를 지내주리라 생각했다. 지난 몇 년의 인연과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언젠가 내 장례식에 그가 와주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