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스트레스로 병나다

이번에 한 삼 일을 앓았다. 어제는 그야말로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것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싶었다.

이렇게 심하게 앓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원인은 이랬다.

과로.

회사 일이 많았다. 듬직하게 일을 맡아주던 신작가님의 퇴사로 빈 자리가 컸다. 물론 일도 많이 쳐냈지만 빈자리는 주로 내가 메울 수밖에 없었다. 영업 마케팅하느라 바쁜 시간을 쪼개 제작 과정에 참여했고, 주말에도 밤에도 일을 계속 할 때가 많았다.

일 외에도 밤마다 영상을 편집했다. 이제 영상을 올릴 때가 되면 압박감이 든다. 잠 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영상을 편집하는 날이 길어졌다. 영상은 내게 기껏해야 한 달에 10만 원을 벌어다 주는데… 나는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이게 내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깨있는 시간 내내 일을 했다.

과음.

그 와중에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일을 하거나 영상을 편집하는 게 내 일상이었다.

(고된 하루를 마쳤을 때 생맥주 한 잔이 주는 그 짜릿함이여! 우리 조금 떨어져 지냅시다. 😭)

사람 스트레스.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정말 스트레스를 받는 분야는 적막을 방해하는 소음과 무례한 사람이다.

학창시절 나는 소음을 내는 녀석들과 도서관에서 주먹 다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공동의 규칙을 깨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대체로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 연장에서 보자면, 나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신뢰하지 못한다.

최근에는 업무적인 일로 만난 네 명의 고객과 갈등이 있었다.

쉼없이 연타를 맞은 마지막 날, 나는 넉다운되어 앓아 누웠다.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어 이렇게 남긴다. 이 네 가지 일은 모두 일주일 안에 일어난 일이다.

연타#1 시지프스 같은 개미지옥

제주도에서 올레길 책을 쓴 장연(가명) 작가라는 분의 책을 맡았다. 작업물을 열 번이나 수정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하면 이런 문제점이 나타날 겁니다, 해도 막무가네다.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생기면 이번엔 또 마음이 바뀐다. 1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수정의 개미지옥에서 나와 팀을 구해야 하기에, 오늘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저번 이메일부터 계약해지를 빌드업했는데, 이럴 땐 변호사와 일해본 경험이 꽤 도움이 된다. (아픈 과거지만)

연타#2 의사 감투를 쓴 먹튀 사기단

건대 의대 심혈관 쪽 교수인 양현순 씨(가명)와 이대 의대 명예교수라는 서똥문 씨(가명)에게는 삼 백만 원 상당의 먹튀를 당했다. 명예교수 서동문 씨가 퇴직을 하기 때문에 은퇴 기념 출간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대기가 1월까지 차 있었는데, 너무 중요하다며 사정사정하기에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해줬다. 그런데 기념회가 취소되었나 보다. 태도가 돌변한다. 통화를 하는데 “아니 원고의 일러스트를 새로 안 그러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자고로 출판이라 함은… 에… 또 편집이라 함은…” 일장연설이다. (원고 내 일러스트를 새로 그린다구? 내 통화를 듣던 디자이너가 옆에서 화들짝 놀랐다.)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아반테를 계약하고 나서는 (실제 계약서도 작성했는데), 차가 필요가 없어지자 계약을 취소하기 위해 작당모의를 하고 찾아온 것이다. 왜 아반테에 8기통 엔진이 없는지, 4륜 구동에 높이 자동 조절되는 에어서스펜션은 왜 없는지, 컨버터블 변환은 왜 안 되는지, 마력은 왜 500마력이 넘지 않는지, 과연 그걸 차라고 할 수 있냐라며 비아냥거렸다. 이 계약이 필요가 없어지자 일부러 시비를 걸어 환불을 받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의사 교수 두 명으로 이루어진 먹튀 패거리 사기단의 진상 행패에 나는 이미 서명한 계약을 포기했고, 매출 전체를 취소하면서 카드 수수료만 몇 만 원을 뜯겼다. 의사라는 사람이 썼다고는 결코 믿고 싶지 않은 허술한 원고를 읽고 분석하는 것조차도 내겐 귀중한 시간의 낭비였는데, 패거리로 합심한 전화 너머로 온갖 모욕적인 말까지 듣고 나니 손발에 힘이 풀렸다. 거기다 계약서까지 쓴 상황에서 동네 패거리처럼 행동한 두 지식인의 태도에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 선의를 업어치기한 젊은 교수의 중간 말장난도 묵직한 배신감을 안겨줬다. 계약할 때엔 저 사람이 늙은 교수라 뭘 모른다며 이해해달라고 하더니 전화할 때엔 또 늙은 교수 편에 붙어서 발뺌하며 나를 공격했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노교수라는 캐릭터에는 항시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파우스트처럼 고뇌와 성숙이 묻어나는 유형이요, 다른 하나는 아집과 권위로 똘똘뭉쳐 세상에 도움은 커녕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추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유형이다. 교수 감투 뒤의 그 비천한 본성으로 서동문 씨는 얼마나 많은 후학들을 괴롭히고 찍어 눌렀을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다. 아, 나는 내 자리나 지켜야겠다, 그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로와 솔루션을 줘야겠다는 사명감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상처 입은 순박한 영혼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 방황하고 있다며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가 결국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출판이라는 고상한 직종에 종사하게 된 덕에 저명한 노교수를 많이 접했다. 종종 겪는 이런 불쾌한 경험은 늘 씁쓸하다. 나이듦의 고매함을 갖춘 분들은 우리 이웃에 숨어있다. 혹은 들판에 있다 (재야). 남들이 보기에 거대한 감투를 쓰고 있다면 뭐든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연타#3 질문지옥

초반에는 원래 통화를 하지 않는데 잘못 걸렸다. 효신건설(가명) CEO라는 분한테 ‘내가 아는 곳은 이런데 거기는 왜?’라는 질문 세례를 수십 차례 받았다. (가격, 절차, 혜택, 방식 등) 내 화를 돋우기 위한 통화인가…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우린 달라요’ 식으로 말했더니 ‘거기서 거기지’라고 나온다. 나중에 또 전화가 왔길래 받지 않았다. 이메일이 왔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의뢰가 너무 많아서 도와드리지 못하니 아시는 곳과 일하시라 . 이런 고객은 큰 돈을 주고 계약을 해도 그 다음이 더 골치다. 왜냐면 눈치가 없고 EQ가 부족해 언젠가는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연타#4 오락가락

마지막 연타는 최고급 컨설팅료를 낸 지방의 유지신데, 내가 1월 중순까지 프로젝트를 마무리짓기로 했단다. 둘이 통화한 녹음 파일을 돌려 보니 ‘초여름 즈음으로 해줘요. 일정에 부담갖지 마시고.’ 이런 말이 나온다. 그래서 통화 파일을 보냈더니 오리발을 내민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바꾸기와 일정 쪼기 스트레스에 계약 해지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말았다. 우리 어머니와 같은 나이 어르신이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가 참기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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