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쓴다는 건 때론 좋은 일이다.
고지서에 대해, 대출 금리에 대해, 답변을 기다리는 까다로운 고객에 대해 신경 쓰는 것 말고. 이번 달 회사 운영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다가도 자꾸만 들여다 보게 되는 것,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
나는 요새 화분에 신경을 쓴다.
“너 때문에 내가 산다.”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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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는 이 녀석은 말레이시아 고무나무다. 사연이 깊고 또 울림이 있다.
인생 2막을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2020년이 지나고, 나는 2021년에 법인을 설립했다. 사무실도 얻었다. 식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길 건너 화원에서 중간 크기의 화분을 서너 개 샀다. 대부분은 죽었고, 두 놈이 살아 남았다. 하나는 야레카 야자수로 지금은 그야말로 번창해서 한 가문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다. 지금도 새싹이 일주일에 하나씩 올라온다. 다른 하나가 바로 이 말레이시아 고무나무다. 녀석은 창가에서 내 관심과 햇살을 번갈아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그런데 실수로 죽어버렸다. 영하 20도 날씨에 그만 창문을 열고 퇴근한 것이다. 하루만에 잎이 축 늘어졌고, 곧 모든 잎이 흐물흐물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그런데 녀석이 부활했다. 혹시 몰라 매일 관심을 주고 따뜻한 창가에 두었더니, 이듬해 3월 봄기운 냄새를 맡고 가시처럼 얇은 새싹이 돋아났다. 그렇게 녀석은 다시 성인이 되었고, 늘 내 자랑이었다.

부활한 녀석은 두 번째 죽음을 맞았는데, 비슷한 실수였다. 내가 창문의 틈을 미쳐 닫지 못한 주말 새 엄청난 한파가 몰아 닥쳤다. 운명일까. 첫 번째 죽음과 같은 형태로 ‘부활한 녀석’은 두 번째로 죽고 말았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나는 지극정성으로 녀석을 보살폈다. 헛수고였다. 봄이 되어도, 꽃향기를 맡아도 녀석은 가지는 장작처럼 바스락거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돌멩이 하나를 들었는데 그 돌멩이 아래로 작고 초록색의 생명이 숨어 있었던 게 아닌가. 집사람은 수분기가 하나도 없는 녀석의 몸통을 보며 “이번엔 안 된다. 누가 봐도 죽었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런데 무심한 돌멩이 아래에서 자신의 숙명을 끝까지 살아내고 있던 이 녀석을 보게 되었다. 온몸에 전율이 돋았고, 눈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한 번 부활하고, 두 번 죽었던 녀석이다. 녀석은 두 번째 부활을 이뤄냈다.
“다시는 너를 죽게 하지 않겠다.” 나는 다짐했다.
녀석은 내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최근엔 아이도 낳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줄기를 잘라 컵으로 수경 재배를 시도한 것이다 (아래 사진). 2주일이 지나도 반응이 없길래 ‘그래, 땅에서 살아준 것만도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오니 줄기 밑으로 빼꼼히 뿌리가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한번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 아이는 지금 화분으로 옮겨졌고, 잘 적응하며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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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죽고, 두 번 부활한 이 녀석은 우리 회사의 로고를 닮았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내 삶’을 추구하는 마음은 이 녀석을 닮고 싶다. 그런데 이 녀석이 주는 거대한 교훈은 따로 있다.
뿌리가 자라는 데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녀석을 죽었다고 말할 때 나는 인내하고 기다렸다. 녀석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줄기를 잘라서 물컵에 꽂아두었을 때에, 하마터면 나는 녀석을 버릴 뻔했다. 뿌리가 자라는 것을 보니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닮았다는 것 말이다.
나는 녀석의 뿌리가 자라는 것만큼이라도 매일 조금씩 자라고 싶다. 뿌리가 내리듯이 천천히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