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에 생각한다.
2만 일도 남지 않은 내 인생에서,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았는가.
단지 기분이 인생을 지배하지 않도록 나는 세 가지 지표를 만들었다. 고강도 운동, 영상 콘텐츠 생산 그리고 글쓰기다. (“나의 새로운 to-do list”)
글쓰기는 내 사명이요, 소명이요, 내 정체성이다. 더 있다. 글은 내 즐거움이요 삶의 의미다. 그래서 그것이 효능감을 갖던 휘발되던 간에 나는 쓰려고 한다.
고강도 운동이 내 몸의 신경을 구석구석까지 확산시키고 근육을 튼실하게 한다면, 글쓰기는 내 인지와 판단의 근지구력을 쉴 새 없이 훈련시킨다.
젊은 시절의 글쓰기가 민첩성과 순간적인 폭발에 의존했다면, 지금의 글쓰기는 사뭇 그 성격이 다르다.

글쓰기는 오늘도 나를 훈련시킨다.
어제는 36주차에 대한 기록을, 오늘은 37주차에 대한 기록을 글로 남겼다. 이런 기록은 날짜별로 주욱 쓰기만 해도 의미가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글 쓰는 나도 재미없고, 독자들에게도 부끄럽다. 나중에 기억할 때도 의미없이 지나 간 날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아주 사소하더라도 특별한 문맥이 있을 때가 아니던가.
글쓰기가 오늘도 나를 훈련시킨다. 그 방법은 콘셉트다.
나는 단순한 기록도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똑같은 식재료라도 요리사에 따라 그 결과는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한 것처럼, 같은 경험도 어떤 콘셉트와 문맥 그리고 패턴으로 엮어내느냐에 따라 소설이 되기도, 시가 되기도, 그리고 우울한 사회 비평이 되기도 한다.
한끼 식사도 다시 못올 그리운 순간으로 만들 수 있고, 아들과의 평범한 대화도 나중엔 사료로 쓰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란 그런 위대함을 가진 사람이다. 모든 무생물과 평범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특권을, 작가는 갖고 있다.
인생은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지루한 반복과 나열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적는 순간만큼은 작가의 특권을 써보려고 노력한다. 권태로운 일상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창조주의 흉내를 낸다고나 할까.

그런 순간은 창작의 기쁨이지만 고통스럽다.
글쓰기는 그렇게 나를 훈련시킨다.
고강도 운동이 내 몸을 단련시키듯이, 글쓰기는 내 정신과 영혼의 잔근육에 부하를 만든다. 성장에는 부하가 필요하다. 때로는 과부하가 필요하다.
나는 스스로 부하를 걸어 몸과 마음과 영혼을 훈련시킨다.
오늘 이렇게 글을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