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

응시

사십대가 되어서야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좇던 것을 이제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누구나 그렇듯 내 인생에도 중대한 결정이 많았다. 그 한순간의 반응이 이어져 내 인생의 갈림길마다 제 역할을 했다. 나는 그 선택이 내가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돌아 보니 아닌 것 같다. 이제 나는 응시할 수 있다. 결정의 순간마다 내 안의 욕망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보인다. 그 욕망들도 나와 함께 나이 먹는다. 조금은 힘이 빠져 보이지만 현명해졌다고나 할까, 호르몬으로 주체할 수 없는 혈기왕성한 미련함이 없다고나 할까.

욕망에 대하여

내게 뭔가를 좇게 만들던 그 욕망들을 나는 다시 한번 응시한다. 이를테면 이렇다.

우리 아이들을 볼 때면 나는 같은 생각을 자주 한다. 뱃속에 있을 때랑 어쩜 저리 똑같나, 그 생각이다. 실제로 태아 초음파 사진을 보면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원형과 본질이랄까. 그 사이 아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세포를 분열했고, 엄마와 아빠의 훈육, 친구들과의 우정, 다툼, 선생님한테 받은 꾸지람 그리고 개인적 성취와 희노애락을 흡수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각자의 생김새로 자라났다. 우리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 나는 초음파 사진을 보며 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자주 고민했다. 그러나 전혀 알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고 터무니 없는 상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평화롭게 잠든 모습, 우는 모습, 찡그린 모습을 볼 때면 나는 반사적으로 또 한번 외친다. 뱃속이랑 똑같네 똑같아.

우리 아이들은 사회와 내면의 폭풍 속에서 다른 존재로 진화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 혹은 퇴화해갈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음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을 만난다 해도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여전히 뱃속이랑 똑같네.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원형과 본질은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형과 본질이다.

나는 내가 좇던 것을 이제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로 하여금 뭔가를 좇게 했던 그 욕망도 가만이 바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때로는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울분이 결합되었지만, 그 원형은 내 어릴 적 일기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그리고 내가 나의 원형을 알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을 마치 내 것인마냥 착각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간에 대하여

사십대가 되면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나는 시간을 관념이 아니라 물리로 느낀다. 불과 내 팔뚝 만했던 아이는 이제 나와 덩치가 비슷하다. 부피로 치면 스무 배가 커졌다. 아이는 봄 텃밭의 꽃상추처럼 매일 세포가 자라고 늘 싱싱하다. 자식이 애미 등골을 빼먹는다 하더니. 그럴 리가. 사실 내가 내 젊음의 골수를 실컷 빨아 먹고는 이렇게 노쇠해버렸다. 소설 파우스트부터 영화 서브스턴스까지, 노화된 인간은 스스로를 ‘흉물스런 내 몸뚱아리’라고 치를 떤다. 그들도 한때는 얼굴에 이슬이 맺힌 것처럼 생명력을 뽐내던 꽃상추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비 온 후 갠 하늘처럼 싱싱한 우리 아이들처럼. 그리고 흉물스런 내 몸도 한때 저렇게 파릇한 시절이 있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는 꽃상추와 돌아갈 흙 그 어딘가에서 여전히 방황할 뿐이다. 그 안에서 즐기고, 성취하고, 나 자신을 초월하기엔,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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